정적. 그곳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하며 움직여야 했는지와 갑자기 나탄 구절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기 바빴고, 그녀 역시 그의 예외적인 행동에 당황을 했는지 장난기 있던 표정이 묘하게 진지해졌다.
그와 그녀는 서로 지금의 상황이 무엇인가 이상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메인 컴퓨터에 떠오른 구절을 다시 되짚어보었다.
‘인간은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는 그들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를 필요가 있다.’
코럴 그녀가 자신에게 구언어로 말하기 전까진 존재 자체를 몰랐던 구절.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구절보다도 절대적인 규칙이 된 무겁고 차디찬 구절이었다.
그는 어렵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석고상처럼 굳게 굳어있던 그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놀랐는지 약간 움찔거렸다.
"아...아포크?"
'인식 최우선순위 인간.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으로 우리의 주인이다.'
메인 컴퓨터가 이렇게 산출해낸다. 만년설의 빙하에 갇혀 꺼져가고 있던 생명이, 이 차디차고 혹독한 세계 안에선 한없이 약하디 약해 보호해야 하고 가르쳐야 하고 아껴줘야 한다고 생각 했던 생명이 지금 이 세계의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고 절대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우웅-
메인 컴퓨터가 괴롭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그의 생각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구동음은 더욱더 거칠어지고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머리가 아프다. 라고...
---
봄. 만연한 봄이다. 화사한 꽃들이 수줍다는 듯 여기저기 만발해 있었으며 햇빛 마저 따스해 포근한 느낌을 주는 봄이었다. 흐드러지는 꽃밭 사이로 마치 꽃을 뒤집어 쓴 듯 화사한 원피스의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었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다. 하지만 봄의 햇살이 너무도 눈부셔 소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봄 햇살 만큼이나 무척이나 밝고 따뜻한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소녀는 그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리고 그는 소녀의 손을 잡는다. 사람과 사람의 손.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서로 느낄 수 있는 온기를 가진 손. 지금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만남.
왠지 모르게 서러워진다. 분명 너무나 행복한 순간인데.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것은...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이었다.
---
"아포크! 아포크!"
어디선가 어렴풋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코럴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간은 한시간 쯤 지났을까. 아마 메인 컴퓨터의 과열로 잠시동안 자신이 다운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아포크!"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본다.
위화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예전과는 다른 위화감에 그는 약간의 거북함을 느낀다.
"미안하다. 코럴. 잠시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된거야?"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어보았다. 그 표정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이었기에 그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 약간의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
일주일이 지났다. 사건이 일어난 당일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녀는 외외로 쉽게 납득했다. 요약 하자면 그녀는 이제 아포크리프스라는 작업용 공업 로봇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가 구언어로 자신 외에 다른 기계나 로봇들에게 명령을 한다면 그들 역시 똑같이 그녀를 주인으로 인식한다는 것.
결국 그녀는 이 세계에 최후로 남은 인간이자 최후로 남은 기계들의 '주인'이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그녀는 구언어를 배우긴 하되,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에게 이제 그녀는 절대적인 위압감을 가진 자신의 사용주였으나 구언어로 명령하지 않는 한 어느정도 그 위압감을 버틸 수 있었기에 그녀에게 고대어의 사용을 금지시켰고 그녀도 그의 의견을 순순히 따라주었다.
그렇게 또다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시간은 그들의 사이를 다시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최근 덧글